메리스가 한창 극성을 부리던 6일
신창호교수님과 함께하는 인문학 기행팀과
강화도로 여행을 떠났다
오늘의 여행 주제는 '양명학의 정신을 따라 걷다 '이다
양명학의 정신을 실천 하고자 벼슬도 버리고 강화도로 오셔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
강화학파라는 학문적 계보와 강화를 양명학의 본산으로 만들어 주신
하곡 정제두 선생님의 묘소 참배를 시작으로 탐방이 시작됐다
교수님께서는 양명학이 탄생하게된 시대.사회적 배경으로서 중국의
역사부터 설명을 해주셨다 학자인 동시에 장군이 었던
명나라 중기 왕수인(왕양명)이란 분이 주자학의 태제를 개변하여 일으킨
새로운 학문으로 마음이 곧 이치라 마음 밖에는 어떤 *理도 없고*事도 없다
하여 *心卽理也*心外無理*心外無物 를 주장
先知 後行이라 주장하는 주자학에 반해 아는것과 행하는것은 별개가 아니다 앎이
있다면 곧 행함이 있어야 하며 알았다고 해도 행하지 않으면 그앎은 진정한 앎이아니라는
知行合一의 사상을 설파 하시며 시작된 학문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양명학은 대부분 기호 소론 계통의 학자들로 당시 주자학 일색의 사회에서
양명학을 한다는 것은 어려워 양명학을 한다 해도 外朱 內陽(겉으로 주자학 안으로 양명학)하던 학자들은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기호남인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어 지고 여기에서 소론은
정치에서 물러나게 되며 그 이후 거의 정권을 잡지 못하고 서인 소론 계통에서 강화학파의 계보가 나온다
양명학의 거두 정제두 선생께서 1709년 61세의 나이로 선영이 있는 강화도 하일리로 거처를 옮기며 그의 자손들인 영일
정씨와 정종의 아들이던 덕천군파의 후예 이면서 정제두의 손자사위 전주이씨 덕천군파 이광명.
손자사위가 된 평산신씨 신대우등이 강화도로 이주하여서 정제두의 양명학을 익히거나 혈연관계를 맺어서 학맥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한말까지 그학맥이 이어지 양명학자 정인보가
이건방을 스승으로 하면서 강화 양명학파의 학맥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내부적 *家學의형태로 전수되었다
근현대사에서 개인을 버리고 국가나 사회를 위해 희생했던 많은 실천가들이 강화학파 이거나 그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

정몽주 선생님의 11대손 정제두 선생님의 묘소로
묘앞에는 상석과 묘비 장명등 문인석 한쌍이 배치 되어 있었다
묘소앞에 부모님의 묘소가 있어 묘소를 쓸때 윗대묘소를 위부터 차례로 내려오면서 쓰는 줄 알고 있는 내상식과
다르게 아랫쪽에 부모님 묘소가 있었다(역장이라고...)
사진 뒷쪽에 있는 묘소가 정제두 선생의 묘소다

열심히 설명하고 계신 신창호 교수님
초라한 이건창 묘소. 묘만 있고 석물은 하나도 없었다
뛰어난 문인임에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신것 같아 맘이 허전하다
이건창은 선대부터 강화에서 살아오던 강화토박이다
5세때 글을 지은 신동이 조선전기에 매월당 김시습이 있고 후기에는 명미당 이건창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이건창은 신동이 었다 15세에 문과에 합격했으나 너무 어린나이에 등과하여 19세에이르러서야
승정원 주서(정7품)직의 벼슬을 받았다 그후 28세때 경기도 함행어사로 발령되어
성품대로 강직하고 청렴결백하게 그소임을 다함에 지금도 서울 송파공원 안에 '이건창 영세 불망비'가 있고
"어사길도" 도 있다

당시 고종이 지방관을 보낼때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가게될것이다" 라고
경고 할 정도로 암행어사로서 또 민란을 수습하는 안핵사로써 명성을 날렸다

이건창의 생가로 1995년 3월 인천 광역시기념물 제30호로 지정 되었다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100여년이 지난 것으로 보이며 안채는 9칸 규모의 .ㄱ.자형태로 대청을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하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내는 등 경기 지방의 전형적인
한옥모습을 보이고 있다

명미당이란 이건창 생가의당호는 할아버지 이시원이 자결하면서 이건창에게준 유언*質明美盡*에서 따온 당호란다
15세의 이건창은 조부의 마지막 말을 새겨 민족관이 남다를수 밖에 없었으리라
*스스로 지키는거 없이 그자만 믿는다면 나중에 반드시 나라가 팔리고 말리라*며 비주체적인 개화를 배격
원리원칙에따른 정치를 해나갔다
현판에 낙인이 매천이라 되어 있어 이건창님이 돌아가실때 보고싶어 눈을 감을수 없다고 하셨던 같은 강화학파 매천 황현
선생의 글씨인가 생각 했는데 현대 서예가 매천(1928~2001) 이왕재님의 글씨라고....
황현 선생 또한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국치를 통분하여 절명시 4편을 남기고 음독 자살한 분이시다




이건창 생가 근처에 있는 조부 이시원 묘와 5대조 이광명의묘 그리고 7대조 이대성의 묘가 있었다
이건창의묘가 이곳에 있지 않고 양도면에 있는것은 그곳이 풍수상으로 좋은곳 이라서후손들이 이장하지 않는다고
강화에있는 묘소들의 봉분이 거의 다 작은데 그 이유에 대해서 선친이 돌아 가시기전 나에게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강화는 섬이기 때문에 봉분을 크게 쓰지 안는다 는 (그래서 강화에 있는 고려 왕능도 초라할 만치 작구나 그리 생각했다)
철종때 이조 판서였던 이시원은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략하여 강화진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국가의 위난에 조금의 도움이
되지 못함을 슬퍼하여 먼저 조상의 묘소에 참배 한후
막내아우 희원에게 가문을 부탁하는 유서를 남기고 아우 이지원과 함께 간수를 마시고 자결하였다 한다
이건창 선생의시는 약400수가 넘는다는데
모두 한시지만 나라사랑과 민족사랑이 표출되어 있어 선생께서 살고있는 강화의 지역과 당시의 시대상황이 만들어난
산물이 아닐런지....생가 마당엔"숭양가는길"이라는 한시가 쓰여진 문학비가 있었다
여기에서 숭양은 개성이다

점심 맛있게 먹고 광성보로 용두돈대는 수리중

다음 코스는 강화읍내에 있는 강화향교
강화향교는 원래 고려 인종5년(1127)고려산 남쪽에 세워졌 던것을 1731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
강화여자 중학교 바로 곁에 있었다
강화에는 교동도에 우리나라 최초로 지어진 향교도 있다
교동도는 조선시대엔 절해고도 유배지 였던 곳인데
이젠 강화 본섬에서 다리가 놓여져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 지난 겨울에 다녀왔다
대성전 안의 모습이다
공자의 영정과 위패 그리고 그 4대 제자 안자 맹자 증자 자사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좌우로 배위 되어 있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때는 향교는 중등교육 기관이라 배우고 가르쳤는데
신창호 교수님께서는 향교는 당시 지방대학 수준이라고 하셨다




다음의 방문지는 연미정 이다
연미정은 강화도 북단의 월곳돈대 꼭대기에 있는 정자다
조선시대 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던 조세선이 한강을 향하다 쉬어 가는곳
청명한 날이면 개풍군과 송악산이 보이는곳
그곳에 수령 400년이 넘는 두그루 느티 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의연하게 역사의 현장을 지키며 서있는 정자


조선 중종5년(1510) 삼포왜란시 전라좌도 방어사로 공을 세우고 1512년 순변사로 함경도 지방 야인의 반란을 진압하는둥
공을 세우고 은퇴하는 황형에게 중종이 하사하여 지금도 황씨 문중의 소유란다
1627년 인조5년 후금과의 정묘호란 당시 강화 조약을 체결 하였던 곳 이기도 하다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는 대나무 숲은 황형이 대마도 정벌시 대마도에서 가져다 심은 것이라 한다

연미정의 멋있는 현판 글씨는 강화도가 고향인 심은 전정우 선생님의 글씨다
심은 선생님은 본인의 모교인 하점면 강후 초등학교가 폐교되게 되자
귀향하시어 그곳에*심온 미술관* 개관. 지역사회에 많은 문화적 헤턕을 주고 계신분이시다
강화가 낳은 천재 서예가로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서예가들의 서체를 망라
118체 천자문을 써 내셔 서예역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남기셨다


탐방을 마무리 하며 ...
참된 도리(實理)를 내심에서 파악하여 참된일(實事)을 실천하려는 江華學
정제두의 학문을 탐구 하면서도 탐구에만 머물지 않고 시문 .국사.국어. 문자학 .경학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해 나가 현대 한국학의 뿌리가된 학문 그학문을 연구 발전 시켜온 많은 훌륭하신 인물들
그들을 당시의 정치는 외면 했을 지라도 역사는 결코 버리지 않았음을 안다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께서는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 책에서 영명학의 강화학파를
[조선사회에서 주류 세력과의 소통은 실패 했지만 역사와의 소통에는 성공한 참 지식인의 전형]이라 평가
지금도 강화에서는 그 학통을 이어 나가고자 공부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것으로 알고 있어 뿌듯한 맘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