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향안치 : 고향에 머무르게 하는 가벼운 유배
◎ 사장안치 : 개인 별장에 머무르게 하는 가벼운 유배
◎ 자원처안치 : 스스로 유배지를 선택하는 가벼운 격리 유배
◎ 주군언차 : 일정한 지방을 정하여 그 안에 머무르게 하는 유배
◎ 절도안치 :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검에 안치시키는 유배
◎ 위리안치 :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가두는 유배, 안치
유배 가운데 가장 중형
제주도로 간 추사의 유배는 가장 최고의 유배인 위리안치였습니다. 울타리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는 유배이지요.
가족과도 벗과도 멀리 떨어져 외로운 유배생활이었지만 이 기간 동안 추사는 백파율사와
선(禪)의 논쟁을 벌였고 독특한 서풍을 만들어내는 등 학문과 예술에 열정을 불살랐답니다.
특히 역관 제자 이상적은 추사에게 청나라에서 구해온 귀한 책들을 보내주며 스승에게 성심
을 다했습니다. 이에 송나라의 소동파가 혜주로 유배되었을때 소동파의 어린 아들이 소동파를
위해 먼 곳까지 찾아온 것에 고마워 “언송도”라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던 것처럼 추사 역시
자신의 언송도를 만들어 이상적에게 준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세한도입니다.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너무 기뻐하였고 그림을 청나라로 가져가서 청나라 학자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 세한도를 보고 청나라학자 16명이 찬사의 글을 그림에 덧붙였지요. 여기에 근대 인물인 오 세창, 정인보 등이 글을 더 붙여서 그림의 길이는 70cm정도이지만 발문의 길이는 무려 13m 나 된답니다. 발문을 더 쓸 수 있는 빈 공간도 남아있지요.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는 서울 용산에서 머물렀지만 1851년 다시 모함을 받아 함경도
북청으로 1년간 유배되었습니다. 북청 유배는 주군안치라는 유배였기 때문에 고을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답니다.
여기에 친한 후배인 윤정현이 함경감사로 오게되면서 윤정현과 함께 황초령에서 발견된 진흥
왕 순수비를 진흥리로 옮기고 비각을 세웠답니다. 이 비각의 현판을 추사가 썼지요.
짧은 북청유배가 끝나고 추사는 아버지인 김노경이 지은 과지초당이 있는 과천으로 돌아와 여
생을 마무리한답니다. 추사가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쓴 글씨가 남아있는데요. 강남 봉은사의 불
경을 보관하는 곳인 대장각의 현판인 “판전”이라는 글씨가 추사의 마지막 흔적이지요.
추사는 그의 글씨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영향을 끼치지요. 조선 뿐 아니라 중국에 이르
기 까지 말이에요. 그렇다면 추사는 어떻게 이렇게 글씨를 잘 썼을까요?
추사가 친구인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답니다.
추사는 “...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 되지만 70년동안 벼루 열 개를 갈아 구멍을 뚫고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했습니다. ... ” 란 구절에서 연습으로 인해 자신만의 서풍을 완성하였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56년 71세의 나이로 추사 김정희선생은 과지초당에서 긴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학자이며 문장가이며 서예가일까요?
바로 아래 그림에서 알 수 있습니다.
“완당선생(추사)은 제가 아직까지 그 모습을 뵙지 않았지만 그 문장과 학문을 오래 우러러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그려 보내드리오니 살펴보십시오. 혹시 모습이 비슷하다
고 여기시면 수염 쓰다듬으며 한번 웃으십시오.” - 1853년 7월 강남에서 정조경
1856년 청나라의 학자 정조경은 추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문복도를 그려 추사에게 보냅니다.
정조경은 추사를 한번도 만난적이 없지요. 하지만 추사의 그림과 문장, 학문에 감동을 받고 존
경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랍니다.
추사 및 그의 작품들의 힘을 알 수 있지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은 영원
할 것이랍니다.